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CRM/ERP)에 도메인 지식이 있다는 착각: SaaSpocalypse 논쟁이 놓친 진짜 질문
2026년 초, 글로벌 소프트웨어 시장을 뒤흔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SaaSpocalypse.
S&P 500 소프트웨어 & 서비스 인덱스가 약 30% 폭락했고, Salesforce, ServiceNow, Workday — 수십 년간 쌓아온 시가총액이 수 주 만에 $1~2조 증발했습니다. AI 에이전트가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를 대체할 것이라는 공포가 시장을 뒤흔들었죠.
그러자 반론이 나왔습니다.
Fast Company에 실린 Faisal Hoque의 글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는 단순한 툴이 아니라 기업 자체를 인코딩한 것이며, 수십 년간 쌓인 비즈니스 룰과 프로세스, 거버넌스 구조가 그 안에 있으니 AI 에이전트가 쉽게 대체할 수 없다는 논지입니다. SAP CEO Christian Klein도 Fast Company 인터뷰에서 비슷한 논지로 응답했고, 많은 업계 리더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양쪽이 공유하는 전제 자체가 틀린 건 아닐까요?
두 진영이 공유하는 틀린 전제
SaaSpocalypse 공포 진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AI 에이전트가 Salesforce를 대체할 것이다."
반박 진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도메인 지식이 Salesforce 안에 있기 때문에 대체할 수 없다."
두 주장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둘 다 같은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도메인 지식은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안에 있다."
이 전제가 맞는지부터 물어봐야 합니다.
실제 비즈니스는 어디서 일어나고 있나
세일즈팀이 오늘 하루 동안 고객과 접촉한 채널을 떠올려보면 — LinkedIn DM, 이메일, Slack, 전화 통화, 오프라인 미팅, 화상 미팅, 카카오톡.
이 인터랙션 중에서 CRM에 들어간 건 얼마나 될까요?
많아야 10%입니다. 현실적으로는 5%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고객이 경쟁사 언급을 세 번 했는데 CRM에 기록됐나요? 미팅에서 예산이 Q3로 밀렸다는 말이 Salesforce에 반영됐나요? 어제 전화에서 나온 "법무팀 검토가 변수"라는 한 마디가 딜 레코드에 있나요?
없습니다. 대부분 영업사원의 기억 속에, 슬랙 DM 어딘가에, 또는 이미 사라진 전화 통화 속에 묻혀 있습니다. CRM 수동 입력이 세일즈팀의 시간을 갉아먹는 구조적 문제는 이미 다뤘지만, 이 글에서 짚고 싶은 건 시간 낭비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비즈니스의 도메인 지식은 처음부터 CRM 밖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반박 진영이 "CRM 안에 도메인 지식이 있다"고 말할 때, 그건 원래 거기 있어야 할 것들이 실제로 거기 있다는 가정입니다. 현실에서 그 가정이 성립하는 기업은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화 인텔리전스 도구가 부분적으로만 해결하는 이유
"그래서 Gong이나 Fireflies 같은 도구가 나온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전화 통화와 화상 미팅에서 나오는 대화를 캡처해서 CRM에 연결하겠다는 방향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 도구들이 연결하는 건 이메일과 미팅 녹취뿐입니다. LinkedIn, Slack DM, 카카오톡, 오프라인 미팅 후 잠깐 나눈 복도 대화 — 비즈니스 인터랙션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 AI의 판단력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데이터가 주어지면 AI는 이미 충분히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수준이에요. 문제는 데이터입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특정 소프트웨어 하나가 전부 보유할 수 없는 구조예요. 어떤 CRM도, 어떤 ERP도, 어떤 대화 인텔리전스 도구도 — 지금 이 순간 비즈니스가 일어나는 모든 채널을 완전히 커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파워는 어디에 생기는가
여기서 논쟁의 프레임이 완전히 바뀝니다.
"AI 에이전트가 SaaS를 대체하느냐"가 아닙니다. "SaaS 안에 도메인 지식이 있어서 대체 불가능하냐"도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흩어진 모든 데이터 포인트를 하나로 연결하는 에이전트를 누가 소유하느냐.
아키텍처를 다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LinkedIn / Slack / Gmail / 전화 / 화상미팅 / 오프라인 미팅
↓
Agent Layer ← 여기에 진짜 도메인 지식이 모인다
↓
Salesforce / SAP ← 백엔드 저장소
이 구조에서 Salesforce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역할이 다릅니다. 잘 설계된 백엔드 데이터베이스로서 중요한 거지 — 파워의 원천이 아닙니다. 이건 이전 글에서 다뤘던 "UI 레이어 vs 데이터 레이어" 구분과 같은 맥락이에요. DB를 제대로 쌓아두면 껍데기는 교체 가능하듯, 에이전트 레이어가 진짜 가치를 만들고 저장소는 그 아래에서 역할을 하는 구조입니다.
파워는 그 위 레이어에 있습니다. 모든 채널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서 컨텍스트를 만들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적절한 데이터를 적절한 저장소에 넣는 에이전트 레이어. 그걸 소유한 사람이 다음 시대의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갖게 됩니다.
에이전트 레이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세 겹의 전문성
에이전트 레이어를 만드는 게 단순히 데이터를 연결하는 문제라면, 누구나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세 겹의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겹: 모든 터치포인트를 연결하는 것 자체
LinkedIn API, Slack API, Gmail, Zoom, 전화 녹취 — 각각의 데이터 소스를 연결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두 번째 겹: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디에 넣느냐
같은 대화 데이터라도 어떻게 구조화해서 어느 필드에 넣느냐는 도메인 지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객이 경쟁사를 언급했다"는 정보가 CRM의 어느 필드에 어떤 형태로 들어가야 의미있는 데이터가 되는지 — 이건 B2B 세일즈 프로세스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만 설계할 수 있습니다. 세일즈 옵스의 핵심 역할이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데이터는 변형해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같은 원본 데이터가 잘못 구조화되면 노이즈가 되고, 잘 구조화되면 인사이트가 됩니다.
세 번째 겹: API 한계를 식별하고 벤더를 밀어붙이는 것
각 소프트웨어의 API는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어떤 데이터는 API로 접근이 안 되고, 어떤 연동은 예상대로 동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이게 API 버그인가, 원래 안 되는 건가?"
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원래 이렇게 동작해야 하는데 API상에서 무엇이 안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소프트웨어 벤더에게 API 개선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실질적으로 생태계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이걸 직접 경험했습니다. Salesforce에 "Slack Connect 채널을 Account 페이지에 표시하고 싶다"고 케이스를 열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안 됩니다"였어요. 제품 설계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였죠. 그래서 Claude와 함께 커스텀 컴포넌트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을 때, 그게 정말 불가능한 건지 아니면 벤더가 아직 지원하지 않는 건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다음 스텝이 나옵니다.
이 세 겹이 쌓여야 에이전트 레이어가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 전문성은 단기간에 복제되지 않습니다.
System of Records 패러다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이 방향으로 실제 베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2026년 2월, Sequoia로부터 $20M 시리즈 A를 유치한 Day.ai는 자신들이 만드는 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존 CRM은 사람이 시스템을 배우고 데이터를 입력하도록 설계되었지만, Day AI는 AI 에이전트가 탐색하도록 설계된 컨텍스트 그래프라는 겁니다.
Day.ai만이 아닙니다. Reevo는 $80M을 유치하며 AI 네이티브 플랫폼을 내세우고 있고, Attio는 누적 $100M 이상을 모금했고, Clarify는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자율 CRM"이라 부르며 등장했습니다. 공통 키워드는 하나 — 사람이 읽고 쓰는 CRM에서, 에이전트가 추론하는 CRM으로.
이 논지가 맞다면 더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Salesforce, SAP, Workday 같은 기존 System of Record도 위험한 거 아닐까요? 수십 년간 사람 중심으로 설계된 시스템이, 에이전트 중심 구조로의 전환 앞에서 오히려 레거시가 되는 게 아닐까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런데 여기서 에이전트 레이어를 소유한 조직의 진짜 강점이 드러납니다.
에이전트 레이어는 저장소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Salesforce가 살아남으면 Salesforce에 연결하면 됩니다. Day.ai 같은 AI 네이티브 CRM이 표준이 되면 그걸 끌어다 쓰면 됩니다. 저장소 레이어에서 어떤 대격변이 일어나더라도 — 에이전트 레이어가 쌓아온 전문성, 즉 모든 터치포인트를 연결하고, 데이터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각 API의 한계를 파악하는 능력은 그대로 이전됩니다.
반면 저장소 자체가 사업의 핵심인 SoR 플레이어들은 저장소 패러다임이 바뀌면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립니다.
SaaSpocalypse가 SoR을 위협할 수 있다는 시각이 맞든 틀리든 — 에이전트 레이어를 소유한 조직은 그 논쟁과 무관한 위치에 있습니다.
SaaSpocalypse 논쟁에서 진짜 답을 찾으려면
SaaS가 죽느냐 살아남느냐는 사실 잘못된 질문입니다.
SAP도, Salesforce도, ServiceNow도 — 없어지지 않습니다. 백엔드 저장소로서, 수십 년간 쌓인 데이터 구조로서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의 원천이 되지 못합니다. System of Record라는 방패가 구원해주지 않는 이유는 이미 다뤘지만, 이 글에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 그 방패의 전제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았다는 겁니다.
반박 진영의 "도메인 지식이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안에 있다"는 주장도 — 맞는 방향의 반론이지만, 전제가 현실과 다릅니다. 도메인 지식이 CRM 안에 있으려면 그 데이터가 실제로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현실에서 비즈니스 인터랙션의 대부분은 CRM 밖에 있습니다.
진짜로 중요한 질문은 하나입니다.
LinkedIn, Slack, 이메일, 전화, 오프라인 미팅, 화상 미팅 — 이 모든 접점에서 발생하는 비즈니스 인터랙션을 하나의 컨텍스트로 연결하는 에이전트 레이어를, 우리 조직은 갖고 있는가?
그 레이어를 소유한 조직이 AI 시대의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갖게 됩니다. 그 레이어 없이 아무리 좋은 CRM을 쓰더라도, 그건 데이터의 일부만 담긴 비싼 저장소에 불과합니다.
SaaSpocalypse가 진짜 종말이든 아니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