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조선비즈 인터뷰에서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유치원 의대반부터 늦은 밤까지 '틀리지 않는 기술'만 배우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AI를 이기겠어요?"
1985년 이병철 회장 시절에 미국 삼성반도체 연구소로 입사해서,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만들고, 2017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끌어낸 사람의 말이에요. 삼성이라는 조직 자체가 "안 틀리는 기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시스템인데, 그 시스템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이 "그걸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이 문장을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생각할수록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구조를 정확하게 꿰뚫는 말이더라고요.
"안 틀리는 기술"의 절대 강자는 이제 AI
정확하게 읽고, 정확하게 쓰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정확하게 분류하는 일. 이런 작업에서 인간이 AI를 이길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권오현님은 이 인터뷰에서 반도체 산업을 양궁과 클레이 사격에 비유했어요.
"메모리 반도체는 명확한 과녁에 쏘는 양궁 같은 기술이에요. 정밀한 미세 공정으로 불량률을 최소화해서 계속 10점을 쏘는 식이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메모리는 읽고 쓰는 기능이 기본이에요. 목표가 뚜렷합니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는 움직이는 과녁을 상대로 해요. 어떤 칩이 필요할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가 10년 전, 20년 전에 AI 칩이나 스마트폰 칩(AP)이 필요할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비메모리는 움직이는 과녁을 상대로 해요. 미국만 유일하게 시스템을 계속 정의하면서 가고 있어요. 지난 20년간 미국은 움직이는 과녁을 쏘는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육은 20년 동안 양궁 훈련만 시킵니다. 과녁은 정해져 있고, 10점을 맞추는 정밀함만 요구하죠. 수능이라는 고정 과녁에 정확히 쏘는 기술. 영어 문법 시험에서 틀리지 않는 기술. 수학 공식을 정확히 대입하는 기술.
그런데 이 "안 틀리는 기술"의 최종 진화형이 AI입니다.
AI는 문법 채점을 인간보다 정확하게 하고, 수학 문제를 인간보다 빠르게 풀고, 데이터 분류를 인간보다 일관되게 해요. 한국 교육이 20년에 걸쳐 만들어내는 인간의 스펙이, AI의 기본 사양보다 낮습니다.
한국 교육은 20년에 걸쳐 AI의 하위 호환 인간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하위 호환"이라는 말의 잔인함
하위 호환(backward compatible)은 상위 시스템이 하위 시스템의 기능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윈도우 11이 윈도우 10용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는 것처럼. 상위 시스템은 하위 시스템이 하는 일을 전부 할 수 있지만, 하위 시스템은 상위 시스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죠.
AI가 상위 시스템이고, "안 틀리는 기술"로만 훈련받은 인간이 하위 시스템입니다. AI는 이 인간이 하는 일을 전부 할 수 있어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저렴하게. 하지만 이 인간은 AI가 하는 일의 일부만 수행할 수 있고, 그마저도 성능이 떨어집니다.
기존의 담론은 대부분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구조였어요. AI가 주어이고 인간이 피해자죠. 그런데 "하위 호환"이라는 프레임에서는 교육 시스템이 주어입니다. 교육이 처음부터 AI보다 못한 스펙의 인간을 20년에 걸쳐 제조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AI는 거울이에요. 거울에 비춰보니 우리가 만들어온 인간의 스펙이 AI보다 낮았던 거죠.
중학교 영어 수업에서 느낀 위화감
저는 이 감각을 중학교 때 처음 느꼈습니다.
영어 시간에 1시간 내내 문법을 가르치더라고요. 그때 자연스럽게 든 의문이 있었어요.
한국어 배울 때는 문법 배운 적 없는 것 같은데, 왜 영어는 문법을 배우지?
그리고 하나 더. 문법을 가르치는 저 선생님은 영어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이 방식으로 배우면, 시험만 잘 치고 외국인과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귀를 닫았어요. 의식적으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회로가 머릿속에 만들어지는 게 싫었거든요. 대신 콜린스코빌드 영영사전을 사서, 모르는 단어의 설명을 영어로만 접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자막을 안 봤고요. 영화관에도 안 갔어요. 스크린 밑에 한국어 자막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눈이 가니까.
미국 드라마나 해외 영화를 자막 없이 보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 방식으로 배우면 안 된다"는 거부감이 훨씬 컸던 것 같습니다. 뭔가 잘못된 건 확실했으니까요.
나중에 대학생 때 궁금해서 토익을 딱 한 번 봤어요. 별다른 준비 없이. 945점이 나왔습니다. 물론 남들이 토익 시험 준비해서 보는 기간보다는 전체 준비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10년은 족히 넘을 겁니다.
양궁 점수도 높고 클레이 사격도 하는 사람
토익 945점은 양궁 점수입니다. 고정 과녁에 얼마나 정확히 쏘는가. 그런데 이 점수가 영어의 진짜 실력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한국에는 토익 900점 넘기면서 외국인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에요.
진짜 영어 실력은 움직이는 과녁 앞에서 드러납니다. 실시간 대화에서 전략을 짜고, 문화적 뉘앙스를 설명하고, 상대방의 맥락에 맞춰 즉석에서 톤을 조절하는 것. 시험지 위의 영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영어.
그리고 여기서 "하위 호환" 프레임이 다시 돌아옵니다. 토익 945점짜리 능력은 지금 AI가 더 잘해요. 문법 채점, 독해, 리스닝 — AI는 990점을 매번 찍습니다. 고정 과녁에서는 AI가 압도적이에요. 하지만 실시간 대화에서 문화적 맥락을 읽고, "이 톤은 한국에서는 안 통해"라고 판단하는 능력은 AI가 아직 인간만큼 하지 못합니다. 움직이는 과녁을 쏘는 클레이 사격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에요.
권오현님은 "안 틀리는 시스템"의 예외였다
권오현님 본인의 궤적이 이 구도를 증명합니다. 197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카이스트 석사로 반도체를 공부했어요.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말했습니다.
"75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카이스트 석사로 반도체라는 학문을 처음 배운 거예요. 한국엔 반도체 산업이라는 게 아예 없을 때였어요."
존재하지 않는 산업을 공부한 거죠. 삼성 안에서도 적자 사업부를 반복적으로 맡았고, 주말에 출근하지 않고 예술가와 PD를 만나러 다녔어요. 칼퇴근을 했고요.
인터뷰에서 김지수 작가가 물었습니다.
"삼성이야말로 '안 틀리는 기술'을 잘 익힌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요. 모범생들만 모이는 곳 아닙니까?"
권오현님의 답이에요.
"모범생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스스로 하는 일은 잘 못해요."
그런데 주변에서 의심해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적자 사업부를 턴어라운드 시키니까, 그 성과가 자유의 보호막이 된 거죠.
"전교 1등 하면 아무도 안 건드리잖아요."
자녀 교육도 같은 원칙이었습니다. 딸을 학원에 한 번도 보내지 않았고, 명문대는 못 갔다고 했어요.
"'아빠가 그렇게 교육해서 불행하냐?' 물었더니 행복하대요. 그럼 된 거예요. 꼭 명문대 나와야 행복한 건 아니니까."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학원에 안 보내는 건 교육 철학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학원에 가야 같이 놀 친구가 있는 나라에서, 아이의 사회적 고립을 감수하는 결정이거든요. 그걸 한 겁니다. 삼성에서도, 집에서도 "안 틀리는 기술"을 거부한 사람이에요. 언행일치예요.
스타트업이라면, 채용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교육에서 끝나지 않아요. 스타트업 채용으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AI 네이티브 회사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채용 기준은 과거 그대로인 곳이 많아요. 학벌, 자격증, 경력 연차, 정형화된 역량 테스트. 이건 "안 틀리는 기술"을 잘 익힌 사람을 걸러내는 필터입니다. 그런데 양궁형 업무는 이제 AI가 해요. 그러면 인간에게 남은 역할은 AI와 다른 축에서 작동하는 거예요.
정해진 과녁 없이 자기 과녁을 정의하는 사람. 맥락을 읽고 판단하는 사람.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기 로직을 세우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이력서의 스펙으로 걸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 필터에서는 "검증 불가능"으로 분류되기 쉽죠.
AI 네이티브 회사의 진짜 마인드셋은 AI 도구를 많이 쓰는 게 아니에요. 양궁은 AI에게 맡기고, 클레이 사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그 조합 안에서 답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설계하는 거예요. 구조의 문제예요. 과거의 채용 기준으로 뽑은 사람에게 AI 도구를 쥐여주는 건, 도구가 바뀌어도 과녁을 보는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조직 차원에서 이 감각이 닫히는 구조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AI를 "이기려" 하지 마세요
패스트 팔로워 시대는 끝났고, 안 틀리는 기술로는 다음 단계가 없어요. 반도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AI가 못 하는 걸 하는 인간이에요.
고정 과녁을 정확히 쏘는 양궁 선수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녁을 추적하는 클레이 사격 선수 같은 사람
존재하지 않던 산업을 만들어내는 사람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로직을 만들어내는 사람
올바른 문제를 찾아내고, 끝까지 풀어내는 사람
권오현님이 인터뷰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한 말이 이 글의 마침표가 됩니다.
"학창 시절부터 '틀리면 어떡하지?' 보다는 '틀려도 한번 해볼게' 쪽이었어요."
AI의 하위 호환이 되지 않으려면, 안 틀리는 기술 경쟁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 경쟁에서는 이미 AI가 이겼으니까요.